민달팽이 이야기
다음은 옛날에 어디엔가 썼던 수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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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골 생활을 시작하고 얼마 되지 않아 이 놈을 난생 처음 봤다.
저녁 무렵, 들길을 산책하고 있는데 뭔가 꾸물꾸물 기어다닌다.
그냥 벌레 같기도 한데, 건드리니 길던 몸뚱이가 공처럼
둥글게 뭉쳐지는 게 아닌가.
"아, 이게 말로만 듣던 그 민달팽이로군."
이런 생물을 처음 보니 신기했다.
집을 등에 지고 다니는 달팽이야 한국에도 천지로 널렸지만...
비만 오면 달팽이가 분꽃 잎 아래 대롱대롱 매달려 있었다.
어릴 때는 그걸 집안에서 갖고 놀았다.
먹이도 주지 않는데 살아 있는 게 신기했다.
물 뿌린 화분에 떨구어 놓아도 한 자리에서 가만히 있지 않고
열심히 산책을 하며 온 방 안을 휘젓고 다녔다.
책장 위를 기어다니다가 간혹 열어 놓은 서랍 속으로
들어가서 며칠 동안 갇혀 있기도 했다.
그 달팽이 뒷얘기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 때도 민달팽이라는 게 있다는 얘기는 들었지만,
한 번도 본 적이 없어서 매우 궁금했다.
집을 달고 다녀야 달팽이라고 할 수 있지, 없다면 대체 어떤 모양일까?
이 궁금증이 드디어 독일에 온 뒤 풀린 것이다.
와, 신기하게 생겼다. 그리고 어쩌면 이렇게 클까?
그보다 전에 Weinbergerschnecke 를 봤던 터라,
독일 달팽이는 모조리 이렇게 큰 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했었다.
호기심에 민달팽이를 집어들어 살펴보았다.
눈이 어디에 붙었고 또 어떤 구조인지 궁금했다.
그런데 도저히 관찰을 할 수 없었다.
민달팽이는 보통 달팽이와 전혀 달랐다.
찐득거리는 분비물이 강력 접착제보다 더 강했다.
쩍 달라붙어서 끈적거리니 손에 쥐고 있을 수가 없었다.
이 끈끈이는 비누로 씻어도 사라지지 않았다.
저녁 내내 기분 나쁘게 찐득거리는 손 때문에
아무 일도 할 수가 없었다.
정원이 있는 집으로 이사를 했다.
첫 해, 땅을 뒤집고 야채밭을 만들었다.
올해부터는 무공해 야채만 먹게 된다는 기대로 부풀었다.
멀리 떨어진 대형 종묘상을 일부러 찾아가서, 열무, 부추,
루콜라, 파슬리, 바질, 딜의 씨앗과 몇 가지 상추 모종을 샀다.
상추를 밭에 옮겨 심은 뒤 대략 1 주일간 비가 내렸다.
어느 화창한 아침, 밭을 둘러보러 나갔다.
그런데 이게 웬 일?
상추는 두어 포기를 제외하곤 모조리 뽑혀 어디론가 사라지고 없었다.
누가 이걸 뽑아 갔을까? 혹시 도둑이 들었나?
대체 이런 걸 훔쳐갈 도둑이 어디 있다고...
자세히 보니, 뽑힌 게 아니었다.
땅 위로 약간 솟은 줄기의 잔재가 보였다.
군데군데 이파리 조각도 보였다.
상추 모종을 새로 사 왔다.
이번에는 조금 더 자란, 비싼 모종이었다.
저녁 무렵, 모종을 옮겨 심으러 나갔다가 드디어 도둑을 발견했다.
도둑은 한 놈이 아니었다.
대략 서른 마리 쯤 되는 민달팽이 부족이 마지막 남은 상추로
한창 디너를 즐기는 중이었다.
난감했다.
모종 옮겨 심는 걸 포기했다.
그런데 이걸 어쩐다...??
다음날 아침 일찍 서점으로 달려갔다.
대여섯 시간을 꼼짝도 않고 앉아서 수십 권의
책을 뒤적인 뒤, 마음에 드는 책을 하나 샀다.
목차에 '달팽이 확실하게 퇴치하는 법' 이 나와 있는 책이었다.
거기에는 스파게티 집게 요법, 맥주 요법,
알갱이 요법 등 달팽이 퇴치 방법이 여럿 적혀 있었다.
이놈들은 암수 한 몸으로 태어난다고 한다.
그러나 혼자서는 번식을 못하고, 파트너를 만나야만
둘이 번갈아가며 성(性) 을 바꾸고 차례로 알을 낳는다.
그래서 그 어떤 동물보다도 번식율이 높다는 것이다.
이것 참 큰일이구나... 나는 서둘러야 했다.
집오리나 고슴도치가 민달팽이 요리를 즐긴다고 하지만,
그런 짐승들을 매번 초대할 형편도 되지 못했다.
우선 스파게티 집게 요법을 읽어 보았다.
"스파게티 집게를 이용해서 민달팽이를 집어 올리면
절대로 미끌어져 도로 튀어나가지 않는다.
이들을 깡통에 채우고 뜨거운 물을 부으면 즉사한다."
윽, 그다지 즐거운 방법은 아니네.
게다가 스파게티 집게를 사용하기 시작하면,
스파게티 먹을 때마다 민달팽이 생각이 나서
식욕이 싹 사라질 것 같았다.
다음 단원 : 맥주 요법
"조그만 컵에 맥주와 물을 섞어 반 쯤 채운 뒤,
뚜껑을 덮지 말고 화단에 꽂아 둔다.
비가 들어가지 않도록 지붕 비슷한 덮개를 설치한다.
민달팽이는 맥주 냄새를 좋아하기 때문에
유인이 쉽고, 한 번 빠지면 결코 헤어나지 못한다."
아, 이게 조금 덜 끔찍하군.
나는 알디에서 파는 맥주를 사다가 퇴치 작업을 시작했다.
효과가 없지는 않았다. 아니, 확실히 효과는 있었다.
다만, 맥주통 근처를 지나는 녀석이 아니면 빠지지 않는 게 문제였다.
아무리 맥주 냄새가 그들의 구미를 당긴다 해도,
야채밭이 온통 맥주통이 아닌 다음에야, 익사하는 놈들보다는
살아남는 놈들이 더 많을 건 뻔하지 않은가.
게다가 1 주일에 한 번씩 10 여 개의 컵에 맥주를 채우다 보니
그 비용도 만만치 않았다. 가장 싼 알디 맥주인데도 말이다.
책의 저자가 자기의 경험담을 쓴 글이 있다.
"텃밭 애호가들 중에는 민달팽이 사냥을 즐기는 이들이 꽤 많다.
그들은 미끈거리는 놈들이 눈에 띄는 즉시
가지치기용 가위로 싹둑싹둑 잘라 버린다."
흠~~ 끔찍하지만 그래도 스파게티 집게보단 낫군.
나는 매일 저녁, 민달팽이 사냥에 나섰다.
자르는 즉시 튀어나오는 내장 때문에 비위가 상하기는 했지만,
텃밭의 안전이 더 중요했기에 끝장을 보고자 열심히 뛰었다.
어느 비 내리는 오후,
우장을 걸치고 거름더미를 살피다가 화들짝 놀랐다.
1 제곱미터 쯤 되는 거름더미 위에 수효를 짐작할 수 없는
엄청난 민달팽이 떼가 모여들어, 솎아 낸 잡초를
열심히 갉아 먹고 있는 게 아닌가!
나는 한 자리에서 멈추지 않고 민달팽이
사냥을 하며 숫자를 세어 나갔다.
456, 457, 458... 978, 979, 980... 1211
나의 숫자 세기는 여기서 멈췄다.
다음날, 손가락이 퉁퉁 부어 더 이상은 달팽이 사냥을 나갈 수도 없었다.
이제 절대 하지 않으려 했던 최후의 방법을 써야 하는 상황에 놓였다.
알갱이 요법---
이 방법을 사용한 뒤로는 상추도, 딸기도, 바질도
아주 깨끗한 상태로 수확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이걸 쓰면서 찜찜한 마음이 아주 없는 건 아니다.
현명하신 텃밭 전문가 및 애호가 여러분께,
돈 많이 들지 않고, 힘 많이 들지 않고, 위생적이고,
역겹지 않고, 무공해로 민달팽이를 물리칠 방법은 없을까요?